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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18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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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The left stairs
이걸로 끝!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고민에 빠진 탓이었다. 밥 한 끼 정도가 뭐 대수랴 싶겠지마는, 같이 먹는 사람이 다이무스 홀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때우는 식사는 어림도 없고, 적당한 선이라고 하면 죄 데이트 코스뿐이다. 형편 상 예약제 레스토랑을 잡을 수도 없으니 도무지 어디에서 뭘 먹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준 건 고맙지만,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끝날 일이 아닌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냥 상투적인 인사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가 아는 다이무스 홀든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식사 한 끼는 좋든 싫든 대접해야 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이글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 그냥 쌩까.'라고 했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처지에 그게 될 리가 없다.
이제는 말투만 닮아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자꾸만 겹치는 바람에 해야 하는 말도 헷갈리는 판국이다. 다이무스가 할 말을 제가 하질 않나, 말해놓고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다 뒤늦게 깨닫질 않나, 아주 엉망이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눈치를 살피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이무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렸다.
역사를 읽으러 서점에 들르는 사람보다 물건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못 알아챌 법도 한데 다이무스는 조금 느릴지언정 루이스의 시선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양심이 찔리는 거라고, 전에 진 빚을 갚아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낮고 진중한 그의 목소리에 설렌다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백날 생각만 해봤자 소용없지만.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고 다이무스를 등지고 섰다. 의식하지 말자. 새로 개장한 인도 음식점이 꽤 괜찮다던데. 맛에 까다로운 카리나와 본토 사람인 라즈도 호평을 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이 끝나면 꼭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고쳐 쥐었다.
오늘만 아홉 번째. 저를 보다 눈이 마주칠라 치면 바로 홱 돌아가 버리는 게 오늘만 꼭 아홉 번이다. 제 눈치를 보며 신경을 기울이는 그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에도 아닌가. 인가 아닌가 흔들리는 것도 슬슬 지친다.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은 분명 전장에 나서는 이에겐 칭찬할만한 덕목이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성격이 꽤, 답답했다. 속 시원히 말 좀 하라던 막내의 말에 이런 식으로 동조하게 될 줄이야. 다이무스는 하루만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능력자의 말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 뿐이지만 그 역시 고객의 한 사람.
다이무스는 제게서 등지고 돌아선 그를 흘긋 바라보고, 소위 진상이라 하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여 사업은 홀든만의 사업이 아니라, 헬리오스의 클랜사무소와 연계된 일이다.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거는 능력자를 차갑게 내려 보며, 다이무스는 이미 몇 번이고 설명한 정해진 규칙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가 들먹인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연합의 영웅을 들먹이며 이따위로 나오면 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짜증보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 영웅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능력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은행 앞에서 시비가 붙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연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엮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이던 그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잡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따로 있다. 이따위에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다이무스는 그를 내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발끈한 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놓으시죠.”
“넌 또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찾더니.”
엷은 쓴웃음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슬며시 흐르는 냉기에 지켜보던 갤러리도 숨을 집어삼켰다.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제 멱살을 쥔 그가 잠시 굳었다가, 마른침을 넘기며 손에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다니 방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연합으로 가시죠.”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아뇨. 모르는데요.”
“뭐 이 새끼야?!”
작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라 했던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루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었던 갤러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멱살을 잡힌 루이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냥 어리고 순하게만 보이는 얼굴이, 잠시 앞머리를 올린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서점 직원 루이스 대신 영웅 루이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독서를 권하던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으로 공기를 얼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그 기백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의 영웅. 루이스.
이 광장에, 이제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다이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공성에서 마주치더라도 가급적이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그저 그런 능력자가 당해낼 리 없다.
“이거, 놓으시죠.”
“윽.... 서, 설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사무실에 가면 당신이 어느 소속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막힘없이 흐르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해서, 이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친절한 상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이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자 그가 뒷걸음질 쳤으나 루이스의 손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숙여 다가가 아이를 대하듯 눈을 맞췄다.
“자, 잠깐. 아니,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겁에 질린 능력자가 루이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아무리 상대가 에이스 능력자라 한들 공석에 있으면 함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그 얕은 믿음 하나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던 자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났다. 건넨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겠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선정적인 그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능력자는 발이 언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서점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건 덤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단하군.”
“별 거 아닙니다.”
“뭐라 했나.”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층계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내민 채 위의 상황을 염탐하던 드렉슬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쏙, 아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 가면 또 이걸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가 있었던 층계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책을 집어 든 그를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호기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고, 덕분에 골칫거리를 하나 치운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그 자신을 위해, 연합을 위해 했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끼어든 이유가 듣고 싶었다.
“어째서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냐고 묻는 거다.”
“...제가요?”
책을 읽는 척 하던 루이스가 손을 멈추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다이무스는 조금 즐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내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 일전에 몰래 맞춰본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일전에 맛본 감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는 숨을 집어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경께서는 왜 제가 화를 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이번에 말끝을 흐린 건 다이무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망설이는 중에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은 초승달처럼 얄쌍하게 눈을 휘며 짓는 미소가 예뻐,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녁을 함께 하며 얘기하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쳤군.”
“아, 아닙니다. 그리고 식사라면 지난번에....”
금세 당황하는 루이스의 반응에 이번엔 다이무스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무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잡아먹지 않는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이 괜찮다더군. 혹시 그쪽 음식은 별로인가?”
“아, 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당혹이 가시고, 안도가 대신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다이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요즘 부쩍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던 아이들의 말이 떠올리고 흘긋, 그 사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덴 것처럼 피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다.
거리는 천천히 좁혀 가면 되는 것이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섞이고 겹친다. 그 간지러운 울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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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제 영원한 레이디 아씨님께 드립니다...☆
“네. 접니다.”
“잘 들어갔나.”
“네. 아무렴요.”
“그래. 잘 자라. 사랑한다.”
“네. 저도요.”
액정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대화.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권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치고, 끝내는 화를 낼 것도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얼굴을 본 지 일 억 년쯤 된 것 같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가끔 하는 통화가 전부라는 게 씁쓸할 뿐이다.
이러다 헤어지는 걸까.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앉았다. 솔직히,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 형이랑 사귀면 금세 나가떨어질 거라던 이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한숨과 함께 침대에 누운 루이스는 찬찬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되새겼다. 벨져는 배우로도 유능했지만, 감독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아직 젊은데도 휙 진로를 틀어서 지금은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쉽사리 오케이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같은 씬을 다섯 번쯤 찍는 건 예사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작업보다 지치는 건 사실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첫 번째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도 주인공을 맡았다. 다이무스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번 질투나 실컷 해보란 심산으로 회사로 들어온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질투는 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원거리 연애도,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별 네 개짜리 호텔답게 떡하니 들어있는 와인을 꺼내 잔을 두 개 가지고 성큼 방을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벨져가 문을 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루이스는 당당하게 벨져의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냐.”
“술 한 잔 하자고.”
“꺼져.”
“이러고?”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벨져는 인상을 쓰며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야밤에 감독의 방으로 들이닥친 주연 배우. 어디 잡히기라도 하면 그 날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는 루이스를 쏘아보던 벨져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퍼마시고 잘 것이지, 왜 저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술만 마실 거라면 그렇게 싸고도는 후배 배우도 있다. 벨져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야 마셔?”
“내일도 촬영이 있다는 건 아나?”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루이스는 눈만 올려 뜨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풍류 없는 놈. 하, 실소를 흘리자 루이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찍을게.”
무엇을. 벨져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싫으면 말고.”
“안 한다고 하지나 마라.”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우수에 젖은 듯, 서늘한 무표정이 당장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한 분위기 대신 긴장감을 더하는 게, 딱 벨져가 원하던 비주얼 그 자체였다. 벨져는 머릿속으로 촬영 계획과 일정을 수정하며 루이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별 일이군. 절대 안 벗는다고 그렇게 학을 떼더니.”
“그럴 일이 생겼거든.”
“형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에 벨져는 확신했다.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녀석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쥐고 흔드는 건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게 그냥 스폰만 받고 끝내지 그랬나.”
“다이무스 홀든한테 그게 돼?”
“못할 것도 없지.”
벨져는 신이 나 웃음을 머금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져온 게 겨우 호텔에 비치된 싸구려 와인이라니, 하여간 멋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뱉었을 와인을 마시며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포기한 누드씬도 생겼겠다, 배우의 감정도 딱 역할에 이입되는 게 감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별로지만, 배우 루이스는 벨져의 심미안을 채우다 못해 탐미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업에 심란한 나머지 어떻게 이용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징그러운 커플의 고난과 주연 배우의 누드씬이 반갑기만 했다.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주고 누드씬. 이 정도면 완전 땡큐다. 짜증나는 연애 상담도, 이 조건이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질렸나?”
“그럴 리가.”
“...어차피 청소년 관람 불가인 거, 야하게 찍자. 할 수 있지?”
“호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운동할게.”
맡은 역에 충실 하느라 원래 체중에서 5킬로그램이나 빼놓고, 자진해서 이렇게 나와 주니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벨져는 여유롭게 등을 의자에 기대며 가운을 벗어보라 손짓했다. 날카롭게 눈을 뜨면서도 잔을 놓고 일어난 루이스가 허리끈을 풀고, 샤워 타월 재질의 가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작품을 천천히 훑으며 벨져는 길게 콧소리를 냈다. 돌아보라 손짓하자 말없이 순순히 따른다.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 곧게 뻗은 등과 도드라지지 않는 세밀한 근육이 나름 볼 만 했다.
“유지하는 걸로 하지. 앞은 됐고, 뒤만 쓰지.”
“그것 참 희망적이네.”
바닥에 떨어트린 샤워가운을 집어든 루이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끈을 동여맸다.
“형아가 보면 난리가 날 테지.”
“그 전에 귀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 역시 그게 좋을지도.”
“흥. 내가 제 발로 기어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나?”
“그래. 그래서 너한테 온 거야.”
“하,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싫으면 마.”
벨져는 샐쭉해진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라도 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담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튕기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벨져는 손에 쥔 걸 놓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멍청이는 눈앞에 있고, 그 덕을 본 건 자신이다. 일단은 영화사에서 압박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흘리는 게 먼저다.
그새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벨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큰 형을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어디 동남아에 잠적이라도 해야 할 성 싶었다.
하나, 둘, 셋. 루이스는 까만 광택이 도는 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숫자를 세고 전화를 받았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그 사이에 머리가 말라서 바람에 휘날렸다.
“네. 접니다.”
‘루이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아, 잠시만요. 응. 아, 거기? 그래 더 찍지 뭐.”
루이스는 핸드폰을 잠시 떼어내고 일부러 들리도록 말했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진 벨져는 방금 찍은 샷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반응을 끌기엔 충분했다.
‘루이스!’
“아,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누드씬을 찍는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적어도 내겐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루이스.’
“내 몸이잖아요. 당신도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
“걱정 마요. 상대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그럼요? 우리, 세 달 동안 한 시간도 못 본 거 알아요?”
‘그건....’
“이젠 당신 기다리는 것도 지쳐요. 나도 내 삶이 있다구요.”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만나서....’
다이무스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고, 벨져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루이스. 다음 숏 들어갈 거다. 여기서 여기까지. 가운을 벗고 테라스에 서. 역광으로 비출 거다.”
“앞에 누구 있는 건 아니지?”
“흥. 볼 것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밉살맞게 말하는 벨져의 엉덩이를 쳤다.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는 바람에 벨져가 발끈해 주먹을 쥐며 노려봤지만 그의 작품을 위해서라도 벨져는 지금 루이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가야 해요. 끊습니다.”
‘루이스...!’
“오려면 오세요. 어차피 안 올 테지만.”
모질게 말하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루이스는 대기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남자 주인공이 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꺼놓고, 하루치 촬영이 끝났다. 벨져는 더없이 흡족해했고, 루이스는 배역의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러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온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 통화 기록이 쏟아졌지만 다이무스의 기록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뒤늦게 불안이 닥쳤으나 그래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맥주를 사러 나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촬영도 없겠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마음으로 여섯 개 들이 팩과 보드카를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회사 차원에서 만난 그는 빈틈없는 슈트 차림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루이스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이무스 홀든쯤이나 되면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남은 병을 비웠다. 벨져의 말이, 다른 모두의 말이 맞다. 오래 갈 수 없는 관계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땐 그냥 이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봐주는 게 기뻐서, 통화 한 번에도 설레서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술병이 비어갈수록 루이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 타는 속에 막힘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마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살인범이면 어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세 번쯤 부딪치고, 겨우 호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단단한 팔이 고꾸라지는 몸을 받치고, 익숙한 향수 냄새와 몸이 훅 루이스를 덮쳤다.
“루이스.”
“다이무스....”
“하아. 이 지경이 되도록....”
한숨을 쉬는 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기댔다. 번쩍 들린 몸이 침대 위에 놓여지고, 루이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팔을 잡고 매달렸다.
“다이무스.... 가지 마요. 나, 계속.... 기다렸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옆자리가 훅 꺼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를 마주 안고 루이스는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래. 안다. 그래서 온 거다. 루이스....”
“가지 마요. 그냥, 나랑....”
“자라. 옆에 있을 테니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눌러 참다가 터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며 등을 쓸어줘도 루이스는 내내 다이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죄책감이 빠듯하게 가슴을 옥죄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일. 내일 얘기하자.”
급하게 비행기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잔 건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할 일이 태산이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람을 안고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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