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의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근 십년간 인구가 늘고 있다곤 하지만 마법사나 마녀의 수는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 사건 이후로 마법사의 인구가 줄다 보니 한 기숙사의 학생이라고 해봐야 백 명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났다 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오, 작은형!”
“저리 가라. 이글.”
“캬, 난 형을 다시 봤지 뭐야. 노땅한테 개겼다가 된통 깨졌담서?”
“그게 무슨 천박한 말투냐! 네 녀석은 조금 더 홀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왜애. 난 작은형이 인간적이어서 좋은걸.”
이글은 혼자 분수대에 앉아있던 벨져에게 다가가 킬킬거렸다.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은 그 나이 소년답게 장난기가 많았고, 홀든의 수치이자 걱정이라는 말답게 호그와트 안에서도 항상 말썽의 중심에 있었다. 홀든 최초로 슬리데린에 들어가지 않은 걸 첫째로, 모범적이다 못해 너무 완벽해 다가가기 힘든 그의 형들과 달리 그리핀도르의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는 주범이자 골칫덩이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천진한 천연덕꾸러기라는 게 이글의 장점이지만 그와 십여 년을 같이 보낸 벨져에게 동생이란 홀든의 어디에서 이런 게 나왔는지 모를 미스터리이자 귀찮은 대상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망가려는 이글의 머리 꼬랑지를 잡아 세운 벨져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막냇동생의 어깨를 잡아 분수대에 앉히고 눈을 맞췄다.
“약속해라. 절대, 절대 그 자식한테 말하지 마.”
“헤헤, 그럼 뭘 해줄 건데?”
“……. 제길.”
“하하하! 이번 호그스미드 외출 때 데리고 나가준다고 약속하면 생각해볼게!”
“이글! 안 된다는 거 알면서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응. 그럼 버터 맥주?”
열두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당당하게 음주를 입에 담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 뱀같은 녀석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만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 한다. 세심한가 싶으면서도 답답할 정도로 둔한 녀석이니 아직 희망은 있다. 벨져는 오늘 있었던 해프닝이 이틀도 안 가 잊히길 바랐다. 교수에게 대든 것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내막이 알려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간사한 뱀처럼 웃는 이글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글이 배를 잡고 웃었다.
“즐거워 보이네, 이글.”
“큽, 푸흡. 그게, 하하! 루이스, 그거 알고 있어?”
“글쎄,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게 호그스미드 외출은 일러. 반장 회의 때 조용히 말씀드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 벌점을 주는 게 나을까?”
“칫, 재미없긴.”
언제 왔는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쌀쌀해진 날씨에도 목을 훤히 내놓은 루이스가 허리를 짚으며 퍽이나 다정한 말투로 이글을 타일렀다. 타이른 다기 보단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어쨌거나 천방지축인 이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글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릴지언정 순순히 물러났다.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을 흔든 녀석이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벨져와 같이 이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내린 눈이 뽀드득 뭉쳐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안쪽으로 보이는 흰 목이, 그 잠깐 사이 벨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목울대를 울린 벨져는 루이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네.”
“가던 길 가라.”
그 사이 차가워진 분수대에 앉자 루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옆에 앉으려나 싶어 한 쪽 다리를 당겨 눈을 치워도 루이스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스타이거 교수님과 한 판 했다며?”
“그게 뭐.”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움찔, 정곡을 찔린 벨져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의 얼굴엔 표정이라 할 게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에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누가 너 따윌 신경 쓴대?”
“아니면 말고.”
“하!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따위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란 거냐?”
“그만.”
서늘한 눈매와 살벌한 눈빛에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따위에 화를 내는 루이스라니, 상상도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벨져 쪽이었다. 자신이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벨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가 널 책임져주기라도 할 것 같아? 사정 안 좋은 게 어디 너 하나야? 그런데 왜 너만 받아줬겠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런 눈빛으로 조용히 타오르던 루이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크게 놀란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눈만 깜빡거리던 루이스가 손을 들기에 지팡이를 꺼내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는 루이스를 본 적이 있던가.
소복이 눈이 쌓인 분수대 앞, 눈이 녹아 얼음으로 굳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같이 고요한 풍경 속에서 루이스가 웃었다. 그 자신도 주체하기 힘든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휘는데, 햇살이 물에 닿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멎고, 햇살이 멈춘다. 멈춘 시간 속에 그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뺨에 열이 몰려, 벨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치고 너무 격렬하게 웃느라 벗겨진 후드 안으로 보이는 흰 목과 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고른 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벨져의 앞에 섰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루이스는 O.W.L.이다 뭐다 해서 바빴던 내내 우중충하게 다니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래.”
“뭐가.”
“스타이거 교수님은 좋은 분이야.”
뜻 모를 말에 미간을 좁히자 루이스가 다시 웃다가 주먹을 입에 대며 헛기침했다.
“내 평생 가장 편한 여름방학이었어. 늘어져라 낮잠도 자고, 밤낚시도 가고. 네가 오해할만한 건 전혀 없었어. 그냥, 뭐랄까…….”
“지금 내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건가?”
“두둔한다기 보단….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스타이거 교수님이 나한테 불건전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한 거 아니야?”
“걱정이라니, 내가? 너를? 하! 착각도 유분수지!”
“그럼 다행이고.”
루이스가 뒷짐을 지더니 슬며시 웃었다. 혼자만 열을 내는 게 분해서, 이를 악문 벨져는 손을 뻗엇다. 뒤늦게 피하려고 해봤자 거리를 좁힌 건 그였고, 벨져의 손은 그대로 루이스의 목을 감쌌다. 몸을 뒤로 빼며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는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고, 발이 미끄러지며 허우적거리다 뒤로 넘어져버렸다.
“으으.”
“흥. 꼴좋군.”
벨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올리자 성대하게 넘어진 루이스가 엉덩이를 만지다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하게 혼자 자빠진 거지만 크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대뜸 내밀어진 하얀 손.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웃음기가 걷힌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풀이 인 헐렁한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손목은 같은 남자의 것치고 가늘고 희다. 왠지, 봐선 안 되는 걸 봐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루이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 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시도, 해석해야 할 필요도 없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자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눈꽃 결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미소가, 흰 눈밭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얍.”
“으왓!”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루이스가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맞잡은 손을 확 잡아 당겼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벨져는 그대로 루이스의 위에 엎어졌고, 루이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솜털 같은 냄새가 확 풍겼다.
“하하하. 아아. 정말이지, 구경꾼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 자식…….”
“벨져 홀든이 놀라는 얼굴이라니. 카메라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루이스는 짐짓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어버렸다.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순박하고 소년 같은 웃음에 벨져는 루이스의 가슴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입가를 씰룩였다.
“감히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미안, 그지만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너만 만나면 되는 일이 없어! 지팡이 들어!!”
“잠깐 벨져, 진정하고…….”
양 손을 들고 순진한 척 눈을 깜빡여 봤자,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올라갔다. 애써 웃음을 참는 꼴이 더 보기 싫어, 벨져는 옆에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다 루이스의 얼굴에 문질렀다.
“차거! 야!”
“죽어!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네가 먼저, 흐앗.”
셔츠 안으로 눈이 들어가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가는 비음을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떼자 루이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벨져를 올려다봤다. 얇게 뜬 눈에, 잔뜩 붉어진 얼굴, 하얗게 서리는 입김. 야릇한 표정에 벨져의 얼굴에 다시 열이 번졌다.
“읏.”
“……벨져?”
“말 하지 마. 그랬다간 죽여 버릴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쥐었다가 놓으며 일어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제 심장 소리가 전부 들릴 것만 같았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글 녀석이 수상한 저주를 건 게 틀림없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혼쭐을 내주리라. 그렇게 다짐한 벨져는 아직도 눈밭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를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망토가 휘날리는 걸 정리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텅 빈 회랑을 걸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고, 루이스로부터 멀어진 다음에서야 벨져는 벽을 짚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자꾸만 그 야릇한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9월 1일. 런던, 킹스 크로스 역. 긴 여름방학을 보낸 호그와트의 학생들이 새 학기를 맞이해 머글들 사이를 오갔다. 머글 태생이나 혼혈 학생들이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지만 머글들과는 거리가 먼 순수 혈통의 학생들은 종종 그들의 시선을 받곤 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의미로 머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소년이 하나.
“제길.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불어오는 바람에 눈부신 은발을 날리며 승강장을 돌아다니던 벨져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성인이 되기 전까진 마법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홀든.”
“윽.”
“설마 길 잃어버린 거야?”
최악. 벨져는 두꺼비를 잃어버렸다며 난리를 피우던 막냇동생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기 싫은 녀석과 마주쳐버렸다 아직 학교도 아닌데 이 면상을 보다니 이번 학기는 벌써부터 재수가 옴 붙었는지도.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이사.”
“이글이라면 두꺼비보단 부엉이라 생각했는데.”
루이스의 후드 안에서 여름 내내 벨져를 괴롭힌 이글의 두꺼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나 개, 토끼처럼 작고 털 달린 작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양서류 역시 달갑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벨져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찼다.
애초에 왜 그런 동물을 귀여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약한 것들은 싫다. 벨져는 남루한 사복 차림의 루이스를 아래위로 훑었다. 원래 지내던 고아원이 파산해서 스타이거 교수네서 지낸다더니 어째 추레한 행색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리 내.”
“내가 이글한테 갖다 줄게. 악몽이라도 꾸면 큰일이잖아.”
“윽, 너…!”
“누구나 무서운 거 한둘쯤은 있는 거 아니겠어. 이쪽이야.”
아니, 달라졌다. 분위기가 다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침착해진데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겼다. 벨져는 트렁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짐가방 하나를 손에 달랑 든 루이스를 따라 걷다가 그를 제치고 앞서 걸었다. 다이무스도 그렇고, 고작 몇 살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어른인 척 앞서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호해야 할 어린애도 아니고, 벨져 홀든에게 미아 취급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벨져, 어딜 갔던…. 루이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나. 좋아 보이는군.”
짜증이 가득했던 다이무스의 얼굴이 루이스 앞에 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다이무스 홀든으로 돌아오는 게 꼴불견이었다. 벨져는 일부러 제 형의 팔을 치며 지나갔다. 그래도 이번 학기만 보내면 다이무스와 일 년에 아홉 달은 떨어져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애써 위안 삼으며 두꺼비 따윈 진즉 잊었다는 듯 신이 나 머글들에 대해 떠드는 이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 작은형! 큰형! 작은형이 때렸어!”
“고생이 많으시네요.”
“……잘 부탁한다.”
“별 말씀을요. 이글. 네 두꺼비.”
“오! 고마워!”
루이스는 웃으며 이글의 손에 두꺼비를 내려주었다. 두꺼비는 괴팍한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 싫은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의 목이 허전했다. 벨져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예감에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벨져?”
“따라와.”
“어? 응? 아니, 잠깐, 기차 시간…!”
9월인데도 루이스는 그동안 역에서 한 번도 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목도리나,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 같은 걸 입었으면 입었지 오늘처럼 날씨에 맞는 가벼운 차림을 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냥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러겠거니 했는데 왜 하필이면. 9와 3/4 승강장에서 조금 떨어진 벽돌 벽에서야 손을 놓은 벨져는 루이스를 벽에 밀쳤다.
“너, 그 머글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거냐.”
“…별 거 아니야. 다 끝난 일인걸.”
루이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뿐 부인하지 않았다. 초연한 반응이 더 짜증나서,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두드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편안해진 표정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는 게 분했다. 좋아 보인다는 다이무스의 말이 떠올라 더 화가 치밀었다. 반장인 주제에 슬리데린의 후배들도 그렇게 챙기지 않으면서 다른 기숙사의 루이스를 그리도 잘 대해주었는지, 왜 똑같이 다퉈도 친동생인 자신이 아닌 그를 두둔하고 돌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어?”
“처음 이 역에 오던 날 도와준 게 다이무스라서. 머글들 사이에선 괴물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흔한 일이야.”
“너….”
“늦겠다.”
자그마치 사 년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다이무스는 알고 있었다는 것도 전부 분했다. 벨져를 밀어낸 루이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이래서 머글들이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멍청이처럼 당하고 있었던 저 녀석도 구제불능인 건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걸음을 옮기다 멈춰서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멍청이. 그런 녀석들은 따끔하게 손을 봐주란 말이야.”
“그런 말은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벨져.”
분하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가 싫다. 저 무심한 눈이 곧바로 제게 향하게 만들고 싶다. 한 눈 팔 여지도 없게 저를 바라보고, 그따위 처연한 미소 따위 지을 여유도 없게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벨져는 단정하게 자른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호그와트로 향하는 급행열차는 급행이라 해도 10시간이나 걸린다. 그 정도면 따져 물을 시간은 충분했다. 감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게 선을 긋고 밀어내다니, 방자한 것도 정도가 있다. 벨져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얼굴을 붉히며 한껏 수치스러워하는 벨져의 얼굴은 그대로였고, 루이스는 이게 드문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루이스는 검지로 뺨을 긁적이다 옆 의자를 뺐다. 벨져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이글의 못된 장난은 아닐까 싶어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지금 강의실 비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루이스는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는 벨져의 입을 막고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로놓았다. 쉿.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리자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몇 시간째 움직이지도 않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다이무스를 가리켰다. O.W.L이 코앞이라 도서관은 시험을 앞둔 5학년들로 살벌했고, 아무리 홀든이라 해도 고작 2학년이니 선배들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루이스는 산술점 책을 한 팔에 안고 벨져의 손을 잡아끌었다.
“휴, 너야 어떨지 몰라도 난 선배들 무섭단 말이야.”
“흥. 그까짓 상급생들, 몇 년 후면 내가 더 뛰어날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련하시겠어.”
턱을 치켜든 벨져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듯 당당했다. 루이스는 책을 고쳐 안으며 어깨를 으쓱여 흘러내리는 망토를 올렸다. 멋대로 움직이는 계단을 타고 마법의 약 강의실인 지하감옥에 내려간 루이스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문 앞에 잠시 서있던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담당 교수인 웨슬리 슬로언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라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후플푸프 학생들과 어디서 도시락을 풀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이스는 벨져에게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빈 강의실에 들어와서 뭘 뒤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뭐 어떠랴 싶었다. 혹시 들켜서 점수가 깎이더라도 이건 벨져의 탓이었다.
“그래서, 뭐가 어려운 건데? 2학년 과정이면….”
“전갈 독 해독제다.”
“아, 그랬지.”
루이스는 찬찬히 재료를 떠올렸다. 다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홀든이 못 만들 것도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루이스는 답을 얻기 위해 벨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벨져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시선을 피했다.
“뭐가 문젠데?”
“…실패한다.”
“그러니까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야. 솔잎을 잘못 으깼다던가.”
“그걸 모르겠으니까, 도와달라는 거 아니냐!”
벨져의 외침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잘 해야하는 입장이니 한 번 실수한 것 정도야 괜찮지만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다. 다이무스한테 부탁하기엔 쪽이 팔렸을 테고, 벨져를 따라다니는 애들은 있어도 같이 다니는 애들도 없으니 만만한 제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좋아. 재료랑 방법은 다 알지?”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일단 뭐가 문제인지 한 번 만들어볼 것을 주문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에 따라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못내 탐탁지않아하면서도 재료를 준비하고 소매를 겉어붙인 벨져가 작은 칼을 쥐었다.
“잠깐잠깐 잠깐!”
“뭐냐?”
“그렇게 하면 썰리는게 아니라 토막나.”
“그거랑 그게 뭐가 다르지?”
하여간 도련님이란. 루이스는 양파썰기를 예로 들려다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벨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념도 없는데 말로 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등 뒤에 서서 벨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너, 이게 무슨…!”
“자, 봐봐. 손에 힘 빼고.”
루이스는 힘을 주어 한 토막을 잘랐다.
“이게 네가 하려던 거고.”
토막난 조각 위에 날을 세워 얇게 저며낸 루이스는 부드러운 벨져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요령이 생겼는지 혼자 잘 써는 게 역시 빨랐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벨져의 옆에 앉았다. 지하감옥은 추운데도 벨져의 목이며 귀가 빨갰다. 화로를 옆에 놔서 그렇겠지만, 옷도 따뜻하게 입은 주제에 혼자 화롯불을 쬐다니 치사했다. 루이스는 양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주먹을 쥐어 턱을 받쳤다. 볼살이 주먹 위로 밀렸지만 차가운 손을 덥히기엔 딱이었다.
“윽….”
“지금! 빨리!”
집중해서 솔잎을 으깨던 벨져가 루이스를 보고 움찔했다. 때마침 솥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에 루이스는 솥을 가리켰다. 벨져가 도마를 들고 으깬 솔잎을 쏟아부었다. 잠잠해진 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된 것 같은데.”
루이스는 발을 까딱이며 마지막 재료인 상아 조각을 건넸다. 벨져는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시간을 세느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삼십오초. 상아 조각을 솥에 넣고 휘휘 젓자 연기가 사라졌다. 성공이었다.
“잘 됐네.”
우유와 같은 흰색을 띠는 약을 확인한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벨져는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너.”
“응?”
솥을 들여다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져가 국자를 놓고 다가와 루이스의 볼을 꽉 잡았다.
“턱받침같은 거 하지 마. 사내자식이 귀여운 척은.”
“…뭐?”
“흥!”
벨져가 볼을 꽉 꼬집더니 솥에서 적당히 끓은 해독제를 유리병에 담았다. 볼은 얼얼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도와줘도 고맙단 말 한 마디를 못하지? 루이스는 내려놓은 책을 다시 품에 안았다.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어디가!”
“귀여운 척 하러 간다!”
“너, 이리, 야!”
루이스는 벨져가 정리를 하는 사이 문을 닫고 계단을 올랐다. 애초에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책을 고쳐안는데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으왓!”
꼴사납게 넘어진 루이스는 얼얼한 이마를 손등으로 비볐다. 신발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발로 신발끈을 밟아버렸다. 무릎이 화끈거리며 따끔거리는 게 아무래도 피가 나고 멍이 들 것 같지만 벨져가 못 봐서 다행이었다. 루이스는 계단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맸다. 다치고 넘어지는 것쯤이야 익숙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야! 루이…. 너, 익….”
신발끈의 매듭을 한 번 더 묶는데 잔뜩 성이 난 벨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망칠수도 없게 좁혀진 거리,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지팡이를 꺼내 복수를 하거나, 한 대 치거나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풀석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눈을 뜨자 벨져가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아있었다.
“뭐해.”
“으응?”
“빨리 업혀.”
“아니, 나 걸을 수 있는….”
뜬금없는 호의에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얼버무리자 벨져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다리를 잡았다.
“아야야야.”
“이러고 잘도 걷겠다.”
“그냥 까진 거니까 바지 잘 잡고 걸으면, 아아. 알았어!”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해보려 했지만 벨져가 아픈 무릎에 손을 얹자마자 아파오는 무릎에 루이스는 양 손을 들어 항복했다.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등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어린 애한테 업히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대론 계단에 앉아서 실랑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댔다. 벨져의 팔이 다리를 감싸고 천천히 일어났다. 떨어진 책을 주워야했지만 안 그래도 무거울텐데 책까지 부탁하기엔 염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따가 가지러오거나,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주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일어날 때 힘들어했던 것과 달리 벨져는 루이스를 업고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그 벨져다보니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따갑게 꽂혀서, 루이스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벨져의 등에 매달렸다. 벨져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왠지 쑥스러웠다.
“저기…. 벨져….”
“말, 시키지…마….”
“힘들면 그냥 내려줘도 되는데….”
래번클로 기숙사는 가장 큰 탑에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높고 구불구불한 계단 뿐이다. 아무리 벨져가 슬리데린의 수색꾼이고, 체력이 좋다 해도 숨이 거칠어지는 건 당연했다. 중간에 누구라도 있으면 그냥 같이 갈테니까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볼텐데, 오늘따라 래번클로 기숙사로 가는 길에 학생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이스는 점점 더해지는 미안함에 벨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진짜 괜찮아. 여기서 넘어지면 그게 더 큰일인 것 같은데.”
“넌…. 후. 항상 그 입이 문제야. 하, 빌어먹을 래번클로.”
루이스는 기어이 래번클로의 청동독수리상이 보일 때까지 자길 업고 계단을 올라온 벨져의 목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땐 벨져도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쉬느라 바빴다.
“잠깐만.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게.”
대답이 없는 벨져 대신 루이스는 독수리상 앞에 섰다.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김 없이 낸 문제에 벨져가 헛웃음을 흘렸다. 래번클로의 황동독수리상 얘기는 들어보긴 했지만 이정도로 어이가 없을 줄이야. 루이스는 독수리상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더없이 진지한 그 옆얼굴이, 투명한 붉은 눈동자가 벨져의 시선과 숨을 앗았다. 작고 붉은 루이스의 입술이 열렸다.
“사랑으로.”
“뭐?”
“일리가 있군. 들어가도 좋다.”
벨져는 엉뚱한 대답을 듣고도 문을 열어주는 황동독수리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문제고 답인가. 벨져는 루이스가 아직 한 번도 독수리상의 문제를 못 맞춘 적이 없다는 게 의아해졌다. 이거 얼굴로 현혹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잠깐 기다려. 물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게. 나이오비! 도와줘요!”
문틈으로 사라져버린 루이스의 망토를 바라보던 벨져는 고개를 들어 독수리상을 올려다봤다.
“사아랑?”
황동독수리상은 벨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벨져는 여전히 질문도 답의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스 녀석한테 물어보긴 쪽팔리고, 다이무스에겐 물어보기조차 싫었다. 혹시나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독수리상을 쏘아보고 있는데 바지를 걷고 붕대를 감은 루이스가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나이오비가 그냥 안 보내줘서.”
루이스가 물병을 건넸다. 시원한 물을 쭉 들이켠 벨져는 포장지까지 까서 기다리고 있던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바를 빼앗아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래.”
“오늘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마.”
벨져는 달달한 초콜릿을 입 안에서 녹이며 생긋 웃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겨우 한 살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키는 벨져와 같은 선에 있어서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하기 편했다. 루이스의 얼굴에서 살짝 눈을 내린 벨져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다리를 끌고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적잖이 아팠을 게 분명했다.
“멍청이.”
“뭐?”
“간다.”
“야! 벨져!”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은 벨져는 루이스의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온 계단을 빠르게 뛰어내려갔다. 사랑이라니,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잘도 하는 녀석의 얼굴과 등에 업혀 어쩔 줄 모르던 녀석의 온기와 무게가 떠올라서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빗자루를 타고 비행을 하던 때처럼 심장이 쿵쿵 울렸다. 장난감 가게의 초콜릿을 먹이기라도 한 건지, 뺨이며 손끝이 화끈거렸다.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