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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이글루이] Agent
요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짬이 안나고 그러는 바람에 옛날에 쓰다 만 거라도 올려놓고 갑니다ㅠ
연재물 업데이트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ㅠㅠㅠ
그를 만난 건 처음으로 참석한 파티에서 였다. 연미복에 보타이를 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파티장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고, 전에 없던 유망주를 맞는 상류층 사람은 너무나 낯설었다.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해선 안 되는 중요 인물이라 말을 걸어오면 걸어오는 대로 응대를 하다 보니 혀가 말을 하는지 손에 든 샴페인은 어떤 맛인지 하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찌어찌 쏟아지는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려, 기왕이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라며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테라스에 그가 있었다.
언뜻, 눈물이 어린 걸 본 것 같았으나 그는 빠르게 자신을 추슬렀다. 그 역시 이런 상류층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등을 돌려 나가는 대신 손수건을 건넸다. 목을 묶은 타이도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푼
처연하고 가련한, 갓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 청년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아. 릭. 릭 톰슨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다가가자 입술을 물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우는 남자가 예뻐 보일 수도 있다니.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이런 청년을 울리다니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냥, 그런 거죠. 뻔한 이야기에요.”
눈물이 고인 눈을 얇게 휘며 웃는 순간 릭은 숨을 집어삼켰다.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갔을 뿐인데
“참. 전 루이스에요. 그냥 루이스.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느 대단한 집안 아들이라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성이라고 부를 게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군.”
선이 곱고 청초한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 그가 손을 내밀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다음.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처음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어서 몰랐는데 예쁜 얼굴만큼이나 손도 작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건 좋았다. 주책없이 심장이 뛸 정도로.
“손수건은 어쩌죠.”
“아, 괜찮소.”
“그럴 줄 알았어요. 보통 이런 파티에 오는 분들은 손수건 따위엔 연연하지 않거든요.”
손수건이 제아무리 비싼들 이 남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든 아깝지 않았다. 대신 여기 오는 분들. 이라는 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가여운 청년이다. 그런 사람의 아픈 과거를 캐묻는 게 신사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입을 뗐다.
“많이 만나봤소?”
“이런 곳에 있으면 싫어도 만나게 되죠.”
“그럼 여긴 왜....”
“...데려와준 사람이 있어요. 보통 이런 곳은.... 혼자 못 오거든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미안하오.”
순진한 청년을 꼬셔서, 저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가차 없이 버리다니. 아픈 상처를 되새기듯 드문드문 말을 잇던 루이스는 자조하듯 웃었다.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죠. 끝났다는 건 알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그런 나쁜...!”
그 쓴웃음이 더 애처롭고 가련해 속으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헐뜯던 릭의 입에서 결국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는 움찔 몸을 굳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봤다. 그 눈에 어린 눈물과, 상처 받은 눈빛에 화를 내려던 릭은 입을 다물었다.
나쁜 사람에게 놀아나다 버려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남은 모양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끝내 상처밖에 남지 않은 청년을 보고 있자니 만난 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은 릭의 마음이 아려왔다. 한 박자 늦게 주제넘은 말이었다는 걸 깨달은 릭은 황급히 말을 고치려 했으나 루이스가 다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봐요.”
“루이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소?”
“...글쎄요.”
“여기. 내 명함이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아, 그,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순수한 호의니 거절하지 마시오.”
“.......”
루이스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릭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귀엽다.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니 오래 전 가슴을 설레게 한 첫사랑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맑은 청초함이 보석보다 눈부시다. 루이스의 미소는 심장을 세게 뛰게 하는 한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경계하느라 굳어진 마음과 얼굴 근육이 슬슬 풀어진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갈게요.”
“그러시오.”
“진부하지만 이만한 핑계도 없네요.”
“하하하. 기다리고 있겠소.”
릭은 손을 흔들어 테라스를 나서는 루이스를 배웅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때? 그 과장님, 넘어온 것 같아?”
“거의.”
“거의?”
소파에 길게 누워 다리를 까딱이던 이글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의 서늘한 무표정을 보며 킬킬 웃었다. 루이스의 재킷이 머리 위로 날아와 얼굴을 덮쳤으나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거의는 무슨. 보니까 완전 홀딱 반했던데. 캬. 나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안 그래, 영웅님?”
“테라스 훔쳐볼 시간도 남고 좋았겠네.”
“그럼.”
몸을 일으킨 이글은 재킷에 이어 셔츠도 벗기 위해 손목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허리와 배를 감싸듯 안고 향수조차 뿌리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자 어느 눈 나린 새벽의 냄새가 나리는 것 같았다. 아득하고, 아찔한 기억 속 풍경을 떠올리고 손을 미끄러트리며 입을 벌리자 루이스가 이글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아직 임무도 다 안 끝났어.”
“싸늘해.”
“누구랑 달리 충동적이지 않으니까.”
깔끔하고 단호한 말과 달리 루이스는 얇게 눈을 휘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랬듯 순진한 미소도, 전부를 걸고서라도 안고 싶어지는 요염한 미소도 아니었지만 뻐근해진 이글의 아랫도리를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충동이라니. 너무하네. 뭐, 사실이긴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고 해줄래?”
“그러니까 그 본능 좀 어떻게 해봐. 비벼볼 게 따로 있지.”
우뚝 선 물건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던 이글은 셔츠 앞섶의 단추를 푸는 루이스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타이트한 요원복과 하네스가 더 금욕적으로 보이고, 그게 더 꼴린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난 지지리 말 안 듣는 애라서,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상이 필요한데.”
“사탕이라도 물려주면 되겠어?”
“사탕 말고.”
“...너 하는 거 봐서.”
이글은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돌린 루이스와 입술이 맞닿고, 그 다음은 전투와도 흡사한 섹스가 이어졌다.
언제 봐도 잘 빠진 등이다. 이글은 행위를 마치자마자 침대를 빠져나간 동료 겸 파트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작게 숨을 토했다. 달달한 말이나, 간지러운 애교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할 것만 마치고 가는 건 역시 조금 쓸쓸하다.
오랜만에 만난 엉덩이는 해후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까만 슬랙스와 바지 안으로 사라지고, 루이스는 이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차갑기가 아주 얼음 저리 가라다. 남극도 이것보단 덜 추울 거다. 하물며 펭귄도 온기를 나누는데.
원망 반, 아쉬움 반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이글의 머릿속에 문득 루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입술을 읽은 것뿐이지만,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기엔 신경이 쓰였다. 애초에 신경이 안 쓰였다면 그런 말 한 마디가 다시 떠오를 리도 없었다.
“아까 그 나쁜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미세하나마 등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픈 구석을 찌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루이스의 서늘한 눈빛에 이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잘못 건드렸다. 이건 좀 위험할 지도.
“홀든.”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관 둬. 홀든이 뭐야, 소름끼치게.”
“누가 먼저 소름 끼치는 얘길 꺼냈는데. 적당히 해. 다음엔 잡혀도 안 빼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 남자는 결국 구하러 올 것이다. 연합의 영웅, 루이스는 그의 이명이 날리는 냉기와 달리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니까. 루이스를 보며 누워있던 이글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괬다.
“걱정 마. 영웅님은 바쁘니까 안 와도 이해할게.”
“안 간다니깐.”
“그럼 큰 형 불러야지 뭐.”
“누군 좋겠네. 양 쪽에 발을 다 걸쳐둬서.”
“그래도 가운뎃다리는 너한테만.... 억...! 잠깐, 잠깐!”
“아예 못 쓰게 만들어줘?”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조준이다. 이래서 특수요원은 무섭다니까. 그만큼 스릴도 넘치는 건 좋지만. 이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섹스도 질펀하게 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최후네.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게 네 얼굴이고.”
질색하는 표정이 가관이다. 소리내어 한바탕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양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루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탄창, 비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네가 대상도 아닌 사람한테 총을 겨눌 리가 없잖아?”
깊은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총을 내렸다. 반은 감이었지만, 정말 쏠 마음이 없었는지 빈 탄창을 빼낸 루이스가 총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수류탄이니 자동소총이나 하는 것들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지만 총기를 손질하는 루이스를 보는 건 좋았다. 칼을 갈고 닦는 무인과도 같은 자세로 침착하게,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하면서 비통함을 곱씹는 그 처연한 얼굴이 좋았다. 보고 있으면 질릴 틈이 없다.
그 얼굴이 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정말 와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더더욱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글은 다시 고개를 드는 탐욕과 갈증에 입술을 핥으며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끈한 등과, 희고 가는 목덜미. 정말이지, 엎어놓고 박고 싶어지는 뒷태다. 저 목에 이를 박아 자국을 새기고, 울긋불긋한 멍을 남기고 싶어 몇날 며칠을 애태우며 공을 들였던가.
이글이 눈으로 다시 한 번 행위를 되새기는 동안 탄창을 채우고 무기의 상태를 확인한 루이스가 그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어디까지 봐주나 간보지 말고 물러나. 다신 안 도와줄 거니까. 지금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하하. 기억해볼게.”
하여간,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니깐. 이글은 루이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입을 비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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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늘 그렇듯 책으로 내기 위해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원고의 90%는 완성되어있으니 나오긴 할 거예요 그때까지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에 둘러싸여 눈이 부시다. 칵테일 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은 루이스는 그런 것들 사이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한 사람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벨져 홀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좋은 옷을 골라 입고 한껏 치장한 벨져는 이 파티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벨져는 절대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벨져의 곁에 있기에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출신도 미천한 하인 따위가 붙어 있어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상한 눈초리와 소문만 더할 뿐이었다. 하인 따위를 대동해야만 공식 석상에 나올 수 있는 벨져 홀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괜히 빌미를 제공하느니 떨어져있는 게 나았다.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뜬 루이스는 벨져에게 물을 갖다 주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이름도 잘 모르는 술을 마셨다. 술을 나르는 다른 하인의 눈초리가 곱지 않고, 입술을 축이는 정도였지만 알콜인지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에 목과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이글 도련님.”
“그렇게 걱정 돼?”
주어가 없는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벨져의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데다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컨디션 관리를 철저히 했고 파티의 교양이나 매너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잠깐 누구 좀 만나볼래? 널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정체 모를 불안이 엄습했으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떠나기 전에 돌아본 벨져는 어느 아가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얼핏 봤을 뿐이지만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아른거리는 장면을 떨쳐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고, 손님으로 북적이던 복도는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정신이 팔려 깨닫는 게 늦었을 뿐, 일부러 사람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글은 노크도 없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오늘 같은 날 작고 아담한 테라스는 밀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로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짓으로 저를 맞는 다이무스를 마주했다.
“미안하군. 따로 불러내기엔 좀처럼 시간이 안 나서.”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달리 다이무스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투였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다는 점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동생들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 상식 밖의 인물을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면서도, 루이스는 가슴을 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먼 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다이무스 홀든에게선 감출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연마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한 사내다.
이글이 가벼운 행동거지로 감춘 예리함과, 벨져의 격과는 다른 무게감에는 자비도, 오만도, 가벼운 흥미도 없다. 그저 책임과 의무에 따른 냉철한 판단과 결단만이 있을 뿐.
그래서일까. 짓눌리는 듯한 침묵과 그의 눈빛에 압도된 나머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만났을 뿐이지만 루이스의 감은 다이무스 홀든에 대한 경고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루이스가 조용히 심호흡 하는 사이, 그를 면밀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위스키 잔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잔을 쥔 채 마실 생각을 않던 다이무스 대신, 루이스는 힘겨운 첫 마디를 뗐다.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너무 수고를 많이 들이신 거 아닌가요.”
저택의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그가 굳이 이런 장소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으리란 예상이 맞았는지 다이무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오래 가진 않겠지만, 파티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벨져의 시야에서 자신을 빼내기에 충분하리라. 다이무스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든 채 이글에게 눈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라스에 단 둘이 됐는데도 다이무스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이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입을 축였다. 워낙 단단한 풍채에 엄격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지만, 간단한 손짓 하나에서도 그의 단호하고 정확한 성격이 묻어났다.
은행가라기보다는 역시 군인이나 무인에 맞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손과 그의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자신의 도련님과 비교하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분명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벨져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눈빛은 흠집을 찾는 것처럼 자신을 훑고 있었다. 어떤 틈, 혹은 단점이나 오점을 찾아내려는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책이 잡혀선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루이스는 더 자세를 바로 했다.
볼 일이 있어 부른 주인에게 용건을 먼저 묻는 하인은 없다. 방금 먼저 말을 뗀 것만 해도 주제 넘는 짓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눈을 내리깔자 다이무스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흠.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벨져 도련님껜 아직 제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귀족가의 하인이라 하면 그에 마땅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그에 드는 비용도 물론 만만치 않았기에 하인은 곧 그 가문의 격과 가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금을 쥔 채 무가의 명맥을 이어온 홀든은 그중에서도 단연한 규율과 가풍을 자랑했고, 하인 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태어날 때부터 봐온 이들과 달랐다. 물론 벨져 홀든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주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눈을 마주보며 대등하게 대화를 하는 건 홀든의 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딱 잘라 하는 거절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쫓아다니며 수발만 들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결연한 의지를 담아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하는 거절에 눈살을 찌푸렸다. 냉큼 눈을 내리 깔며 공손한 척을 하는데,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게 척 보기에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마음에 들 수밖에.
“병간호만 하고 있기엔 아깝군.”
“...과찬이십니다.”
위에 선 자로서 부리는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해본 적 없긴 벨져나 다이무스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자신의 태생과 신분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과 현격히 구분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도구나 다름없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글을 한심하다 여겼고, 그것이 홀든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감정에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그냥 부리고 말 도구가 아니라면. 끈질긴 권유에 루이스는 더 거절하기 힘든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이스가 이 자리를 불편해하고 난색을 표할수록 다이무스는 이 초연한 청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지금 막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영민하고 눈치 빠른데다 충직한 아랫사람은 구하기 힘들다. 그런 사람을 고작 병수발 따위에 전념하게 두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 까다로운 벨져를 이렇게 오래 모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청년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둘째 녀석은 뭐든 가장 좋은 몫을 가져가곤 했으니까.
“자네를 꽤 아끼는 모양이더군. 나중엔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텐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꽤 확신하시는군요.”
“흠. 기회에 대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벨져가 마음에 두고 있으니 절대 놓아줄 리가 없다. 아무리 병석에 있다 해도 그의 지위와 재력으로 얼마든지 잡아둘 수 있고, 홀든의 안주인은 아픈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주인의 곁을 떠나는데 이보다 더 깔끔한 제안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이고, 긴 침묵을 깨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눈살을 찌푸린 건 다이무스와 함께 있는 루이스를 발견한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손위형제를 시원하게 무시한 벨져가 루이스에게 다가가 짜증을 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이무스는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벨져는 결코 좋은 주인도 상사도 못 된다. 다이무스는 미래를,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방금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몸값을 흥정했다면 오히려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나 루이스의 고민과 갈등은 이런 데 도가 튼 다이무스의 눈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얘기를 나눴으니 망설이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떠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주겠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제가 드릴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사양하긴 곤란하다고 판단한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굽히고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다이무스는 벨져가 루이스를 옆에 둔 것이 몹시 그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운명의 여신은 어쩜 이리도 얄궂은지.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것을 벨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다. 벨져의 취향이 묻어나는 옷차림만 봐도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훤히 보인다. 순순히 뺏기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벨져에겐 미안하지만 그를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여유가 생길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믿을 만한 사람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깨달은 뒤라 더 간절했다. 진심을 다해,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성적이고 타산적인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그러나 소망하는 바와 달리 그의 말간 눈에 어린 망설임과 애정을 보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든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꼿꼿하게 제 주인을 지키려 하더니 약간의 스킨십에 당황해 붉어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똑부러지는가 싶다가도 어설픈 게 어딘가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고 첫인상을 고치는 사이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벨져가 매서운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벨져.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잔뜩 가시가 돋친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날을 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 것을 빼앗아가려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대놓고 드잡이질을 하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체면을 차리는 걸 보아 둘째 녀석에게 이 하인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픈 동생이 아끼는 걸 뺏기도 미안하지만, 이쪽도 코가 석자다. 이글 녀석이 밖으로 나돌지만 않아도 이렇게 책임과 업무가 과중하지 않을 텐데. 다이무스는 작게 숨을 토하고 벨져와 루이스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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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8.
부상으로 인한 휴가라며 아침도 건너뛰고 느지막이 일어난 루이스는 씻자마자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까딱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그의 무방비한 발을 잡아버리고 싶어진 나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조심히 다가갔다.
“으왓, 깜짝이야.”
발을 잡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던 루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잡힌 발을 뺄 생각은 없는지 버둥거리지도 않아서 나는 마음껏 그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크기와 길이를 가늠했다.
“작군요.”
“갑자기 사람 발을 잡고 하는 말이 겨우 그거예요?”
“작은 걸 작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루이스는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무릎을 모아 앉았다. 발을 놓아주자마자 감추려는 모습이 귀여워 웃자 루이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랑 내 키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요.”
“키만 차이나는 건 아닙니다만.”
뚱하니 토라진 얼굴이 귀엽다. 나는 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루이스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나를 흘겼다. 사실무근한 얘기라면 반박이라도 할 텐데, 사실이라 할 얘기가 없는 모양이라 나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그가 감추듯 오므린 발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쉬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죠?”
“그렇게 느껴집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양 빙긋 웃자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아닌 척 해도 목과 귀가 빨개져서 의식하고 있는 티가 났다. 루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입술 위에 가로놓인 손가락이 입술을 덧그릴 때마다 내 눈이 그의 손가락을 좇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에 해준 파스타 맛있었어요. 카르보나라. 베이컨 잔뜩 넣어서.”
“이런. 베이컨이 없는데요.”
“으음.... 사러 가기 귀찮은데.”
진지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나는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신나게 한바탕 웃은 뒤엔 아까보다 더 뚱해진 표정의 루이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큽, 실례.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아, 정말.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
“...웃기려고 한 말 아닌 건 알죠?”
“물론이죠.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플 정도군요. 후.”
“잘 모르겠지만 성격 나쁘다는 소리 엄청 들었을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이 아직도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바람에 루이스는 더 분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렇다 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이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놨습니다만, 베이컨 대신 햄도 괜찮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선심 쓰듯 말하자 루이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발을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늘어진 자세가 숫제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지만, 내게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헛웃음마저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체 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요. 태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제 기억은 백지라서요.”
“하아....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으면 기운이 빨려요.”
루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부쩍 즐거워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귀여워하며 웃은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미소에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팔을 올린 팔걸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당신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와도 차려준 밥 먹고 잠만 자잖아요. 와, 나 완전 식충이네.”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일부러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과장된 말에 나는 은근하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받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눈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땐 울상도 무엇도 아닌 애매한 미소와 함께였다.
미안함과,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을 담은 미소에 나는 다시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갔다는 걸 느꼈지만 잠자코 루이스를 기다렸다.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기다릴 수 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청소에 빨래에 밥하고 설거지까지 혼자 다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장고 끝에 털어놓은 얘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허무했지만 그 하찮은 고민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자신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세심한 사람이 능력자 전쟁의 영웅이라니, 그 괴리감이 더더욱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당신을 원하는 욕망에 불을 질렀다. 당장 당신을 눕히고 싶은 충동과 뜨거운 열감을 애써 누른 나는 지난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의 경계를 풀만한 입 발린 말을 골랐다.
“그럼 좀 일찍 들어오시죠.”
“음. 그건 좀.”
“내가 여기 계속 눌러 살면 어쩌려고요.”
곤란하다는 듯 짓는 애매한 미소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나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성급하게 달려들었다가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아주 천천히, 당신이 나에게 잡히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음. 일단 내가 애를 써보다가, 정 형편이 힘들어지면 돈 벌어 오라고 내쫓아야죠.”
“그러다 제가 몸이라도 팔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나보다. 당황으로 깜빡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난이라는 걸 눈치 챈 루이스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리기 쉽군요. 이런 사람이 전쟁 영웅이라니.”
“놀리지 마요. 나도 이런 내가 싫으니까.”
나는 눈을 맞추지 않는 루이스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몸을 바싹 붙였다. 은근한 손길로 다리를 만지작거리자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는데 좁은 소파에 앉은 채로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정 뭐하면 시험해보겠습니까?
진득하게 허벅지 안쪽을 긁으며 묻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이었지만 만지면 만지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따라오는 그의 떨리는 눈이 예뻐 자꾸만 손이 갔다. 진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맞추려 다가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만...!”
훤히 드러난 목을 핥아 올리자 루이스가 멀쩡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이제 정말 물러날 때였다. 더 하면 당장 침대에서 쫓겨나는 건 고사하고 며칠 내내 얼굴을 못 볼지도 몰랐다.
“왜 긴장하죠?”
“그야 당신이....”
“걱정 마세요. 당신이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 둘 테니.”
나를 밀어낸 루이스가 미심쩍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방금 핥은 곳을 손으로 덮었다.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있는지 긁지도 않고 대고 있을 뿐이라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루이스와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죠. 나는 그저 말을 들을 뿐입니다.”
의심스러운 눈빛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괘자 루이스가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까?”
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영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자 이번에는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토라진 얼굴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이스가 떠난 자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뭣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죠. 제 진심을 증명할 겸.”
“됐어요. 스토브는 하난데 거기서 자면 벽난로에도 불을 때야 하잖아요. 땔감도 없는데 얼어 죽으려고요?”
“기꺼이 침대에 들여 주시겠다니, 친절하시군요.”
“내 집에서 아는 사람이 동사하는 게 싫을 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투였지만 내게는 그마저도 새침해 보였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전쟁영웅이라니. 이제와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레 대답했다.
“네. 그런 걸로 하죠. 영웅님.”
“그렇게 부르지 마요.”
“왜죠?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당신은 나를 영웅으로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책상에 걸터앉은 루이스는 고개를 숙인 채 울적해진 얼굴로 내가 아닌 바닥을 바라보고,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빠듯하게 죄는 안타까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참고하죠.”
“부탁해요.”
“...그래요. 루이스.”
나에게 당신이 유일하듯, 나 역시 당신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환희와 희열을 눌러 삼키며 낮게 숨을 뱉었다.
연휴라 쉬는 김에 엄청나게 오랜만에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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