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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5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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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재록본 수록용으로 썼던 벨져루이다무 디스토피아물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을 베어도, 다리를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어기적거리며 다가온다. 벨져는 오래 전에 들은 네크로멘서와 죽은 시체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는 시체들의 밤.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랬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머리를 베어야 겨우 멈추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져는 한 발 물러섰다.
깨어나보니 폐허뿐인 낯선 도시, 거기에 베어도 베어도 달라붙는 적, 이미 한 차례 길을 헤맨 뒤라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한다. 벨져는 흉측하게 뼈를 드러내고도 달려드는 그것의 머리를 베었다. 단번에 베지 않으면. 벨져는 양손에 든 검으로 시체가 썩는 악취를 내는 그들을 죽였다. 죽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겐 차라리 죽음이야말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인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가. 검이, 박혀 빠지지 않았다. 얼마를 이렇게 쫓겼는지, 신체강화능력을 사용해도 역부족이었다. 벨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무식하게 높은 건물과, 거무죽죽한 하늘.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조건. 이게 혹시 질 나쁜 꿈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당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가 멍멍한 총성이 울리더니 달려들던 흉악한 얼굴이 발치에 나뒹굴었다. 단 한 발의 총성. 구원과도 같은 소리에 벨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면서 터지는 총성에 맞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나씩 쓰러졌다. 침착하고, 신중한 명중률이다. 검은색 일색으로 무장한 저격수는 벨져 앞에 착지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벨져는 힘주어 검을 뽑았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찬 총이 두 정, 허리춤에 하나, 군용 나이프에 기관총까지 갖추고 중무장을 한 채 큰 가방을 메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멋쩍어져 한 마디했다.
“…사례하지.”
“이봐, 뛸 줄 알아?”
작게 인사를 말하자 흘긋,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꼭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 무례한 언사였으나 그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힌 벨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면 뛰어!”
발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소리에 따질 겨를도 없이 뛰었다. 귓가를 스치는 총성에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목소리도, 눈빛도 어딘가 익숙했다. 불쾌하고 찝찝한 그 감각.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게 하지 마, 토마스. 이봐, 이쪽.”
남자는 빠르게 골목을 돌며 뒤로 돌아 기관총을 쏘아댔다. 벨져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을 달리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기관총 대신 안정적인 자세로 몇 발 더 발포하면서 오른쪽으로 돌라고 눈짓했다. 따라오는 발소리에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격자로 된 철창이 열렸다. 바로 팔만 뻗으면 다가올 정도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총을 바꿔든 그가 쏘아 죽였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썩은 피. 벨져는 마침내 열린 문에서 저를 잡아끄는 손에 끌려가고, 그가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 물린 곳은?”
“물려…? 아니, 없다.”
“운이 좋았네요. 마침 총기점에 식료품을 전달해주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마에스트로. 서류에 있는 사진으로 몇 번 본 게 고작인 청년의 얼굴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석을 동경해 한 달을 걸려 영국으로 건너와 지하연합에 들어갔다는 다른 얼음쟁이. 그가 살갑게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벨져는 뒤를 돌아봤다. 헬멧과 고글을 벗고 머리를 터는 그는 분명 제가 아는 그가 맞았다.
“…루이스…?”
“어, 루이스 씨를 아세요?”
“알다마다.”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지. 벨져는 이를 악물며 눈썹에 힘을 줬으나 루이스는 벨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문을 이중으로 닫고도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있었다.
“참,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토마스라고 해요. 토마스 스티븐슨.”
“벨져 홀든이다.”
“엑, 홀든?”
“그래.”
젊은 결정사가 난처한 듯 루이스를 바라봤다. 명백한 구원요청이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벽에 걸려있는 패드에 무언가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저기, 루이스씨….”
“총알 서른발짜리 전리품 치곤 꽤 짭짤하네. 뭐, 그것도 통신이 먹통이 아닐 때나 소용있는 일이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랑 똑같아. 이봐, 괜찮으면 들어.”
“너…!”
척척 다가온 루이스가 그때까지 매고 있던 가방을 턱 던졌다. 상당히 무거운 무게에 벨져는 가방의 끈을 잡으면서도 일부러 배를 노리고 던진 그를 쏘아봤다. 정작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꼬맹이 자식이 안절부절 못하며 안색을 살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그새 총같은 거나 두르고, 이거 영웅 꼴이 말이 아니군. 이젠 이 몸까지 모른 척이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잘난 능력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이러고 있는 거지.”
“…하아. 토마스, 무시하고 데려가. 아무래도 약이라도 한 모양이다.”
“네, 네!”
얘기를 듣기는 커녕 사람 얼굴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더니 약쟁이 취급이라니. 벨져는 제게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밀어내고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대답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설명해. 밖에 득실거리는 저것들은 또 뭐고, 너는 또 왜…!”
소리치는 중에 팔이 잡히고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순식간에 벨져를 엎어매친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 주변을 털었다.
“일단 올라가서. 조금 진정하라고.”
벨져가 내던진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둔중한 철문 앞에 선 루이스는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그 신호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게 안타리우스의 본거지를 방불케 했다. 불만도 의문도 가득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마에스트로가 다가와 속닥였다.
“루이스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뭐? 무슨 소리지?”
영웅을 동경한다는 주제에 2차 능력자 전쟁과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저를 모른다니. 연합엔 바보밖에 없는 건가.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루이스씨는 얼마 전까지 용병이셨다고 하니까, 음. 아무래도 저같은 일반인은 잘 모르거든요. 이번 일도 그렇고….”
일반인?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결정 능력으로 영웅이 된 사내는 능력 대신 총을 든 용병이라 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벨져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검이라니, 신기하네요.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확실히 총이나 포가 발달하긴 했지만, 홀든이니까.”
“하하, 그래도 확실히 이런 데서 일본도는 보기 드물죠.”
“토마스, 그만 떠들고 와서 이것 좀 밀어봐.”
“아, 네!”
토마스는 루이스와 함께 셔터를 밀어올렸다. 딱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만 열어 허리를 숙여 들어가는데, 더 올리면 될 것을 굳이 몸을 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밖보다도 어두컴컴한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넓은 홀. 벨져는 주변을 둘러봤다. 루이스는 다시 셔터를 닫고 가지고 있던 라이트로 주변을 슥 훑었다. 적막한 공간에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한 번 둘러본 루이스는 라이트도 꺼버렸다. 어떻게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 했으나 잠시 스쳐간 불빛의 잔상에 눈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쪽이 아니라 여기.”
다른 쪽 통로를 봐두려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헤맨다고 생각했는지 루이스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되도 않는 친절에 코웃음을 쳤으나 루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바리케이드가 겹겹이 쳐진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루이스가 문을 열었다. 계단의 비상등에 의지해 걷던 벨져는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토마스, 모두에게 소개 부탁해. 난 가져다 놓고 씻으러 다녀올 테니까.”
“아, 네! 다녀오세요!”
루이스는 손을 흔들어보이곤 어둠 속으로 걸어 사라졌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단 둘이 된 벨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발소리만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저, 저기….”
“뭐냐.”
“따라오세요. 다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면 기뻐할 거예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어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지? 저것들은 또 뭐고.”
사람 좋게 웃던 토마스 스티븐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보더니 갑자기 팔을 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무슨 짓이냐!”
“잠시면 돼요.”
기어이 팔을 잡고 소매를 걷은 녀석은 팔꿈치 안쪽을 보고 나서야 팔을 놓았다. 그리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으로 보는데, 벨져로서는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약…하는 거 아니죠?”
“아까부터 자꾸 약쟁이 취급을 하는데, 전혀 손대본 적 없다.”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토마스가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났다던가…?”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토마스는 금방 백기를 들었다.
“그, 외 떠들썩했던 바이러스 있잖아요. 그게 퍼졌어요. 여긴 몇 안 되는 안전거점 중 하나구요. 다른 데랑 달리 번화가의 쇼핑몰이라 주변이 위험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생필품이 모자라진 않아요. 전기도 돌아가고.”
“바이러스?”
“네, 그 좀비 바이러스 있잖아요. 어딘가에서 연구진들이 백신을 개발중이라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아, 혹시 형제가 있지 않나요?”
“…있다.”
토마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알겠네요. 얼른 가요! ”
뭐가 그리 기쁜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혹시 여기에 다이무스나 이글이 있는 건가. 연합의 인물이니 이글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디 갖다 던져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능력은 어떻게 된 거지?”
“네?”
“자랑하는 얼음 감옥 말이다.”
“얼음이요? 식료품을 최대한 한군데 몰아넣느라 얼음은 없어요.”
마치 능력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한 말투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둘러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가 동경하는 영웅이 저를 한 번 이겼다 해도 그 아래 있는 녀석까지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검을 빼들지 않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는 위화감, 믿을 거라곤 그 잘난 결정능력밖에 없는 주제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 불길한 예감이 벨져의 발목을 휘감고 올라왔다.
“아, 혹시 아까 루이스씨가 쏜 총에 맞기라도 했어요?”
“…아니다. 그보단 안내를 부탁하지.”
“네, 바로 여기예요.”
쇼핑몰이라고 하는 건 백화점 같은 것인지 구역별로 물건이 늘어서있었다. 잔뜩 어질러진 데다 군데 군데 비어있는 게 한차례 소동에 털린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가니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왔어요!”
“토마스!”
“토마스가 왔어!”
“토마스 오빠!”
“뭐야, 누구야?”
“누구랑 같이 왔는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금방 시끄러워졌다. 수가 적긴 했지만 대충 보기에 연합의 능력자들 몇과, 기타 세력의 능력자 몇, 그리고 회사 쪽의 인물도 몇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생 녀석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악에 물들어 한 달음에 달려오는 녀석의 표정이 꼭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다가와 성난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며 무슨 소린지 모를 욕설을 지껄이기 전까지, 벨져는 제게 펼쳐진 지옥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장비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덕에 몸을 움직이느라 몸은 땀범벅인 데다 녀석들의 썩은 피냄새가 배인 옷을 입고 있자니 찝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은 곧 자원. 최대한 물을 아껴가며 샤워를 마친 루이스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피에 젖은 장비엔 미리 만들어둔 소독제를 뿌렸다. 가급적 물을 쓸 일이 있다면 한 번에 신속하게 하는 편이 좋다. 근 십 년간 몸에 익힌 생존지식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 퍽 유용했다.
뒷처리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루이스는 이 층에 유일하게 샤워룸이 갖춰진 직원실을 나왔다. 이 역시 전투인원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그래도 임무를 완수한 데다, 생존자를 한 명 더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관리실 앞에서 걸음은 멈춘 루이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어있는 철문에 대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왔나.”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교환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거기에 생존자를 한 명 구출했고요. 내역은 리스트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다이무스.”
루이스는 딱딱하게 대답하는 그를 불러세웠다. 아직 작동하는 CCTV와 그 통제실에 있는 그라면 들어올 때부터 알았을 것이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으로 등을 돌리고 선 그, 그리고 그 옆에 기대어 둔 기다란 검. 루이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읏…!”
돌아선 그는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더운 숨이 샜다. 혀를 얽고, 몸을 더듬거리다 보니 벽에 부딪쳤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루이스.”
“후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다이무스는 애틋한 눈으로 팔 안의 남자를 바라봤다.
“녀석 때문이냐.”
“…다이무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전,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네 책임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
루이스는 다시금 떠오르는 나쁜 기억에 쓰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팔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눈을 맞추려 했으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버림받고도 주인을 찾아가려는 미련함이 야속했다.
“루이스. 다시 생각해 봐라.”
“노력해보겠습니다.”
“두 번째가 없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뼈아픈 충고였다. 루이스는 제 팔을 아프도록 잡은 그의 팔을 잡았다. 이것이 남자의 질투인지, 아니면 진심어린 충고인지는 모르나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괴로웠다. 루이스는 제 목줄을 잡았던 남자를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황폐화된 도시와 파멸한 인류. 그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해봐야 지옥 속의 시한부 인생에 불과했다. 루이스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요.”
“곧 비가 내릴 거다.”
“그리고 눈이 내리겠죠. 저들이 썩어 없어지는 것과 우리가 저들에게 먹히는 것, 어느 게 먼저일까요.”
“루이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엄한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팔을 잡아 떼자 다이무스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휑하게 드러난 목언저리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루이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마주 안으려 손을 뻗다가 멈췄다. 역시, 아직은 이 남자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 녀석은 널 버릴 거다.”
“…그럴 지도 모르죠.”
따스한 온기를 밀어내고 차가운 철문에 손바닥을 댄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를 버린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제가 얼마나 바보같은지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게 저를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루이스는 무겁고 차가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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