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던가, 벚꽃의 꽃말은 봄학기 중간고사요, 단풍은 가을학기의 중간고사니 대학생들에겐 꽃놀이도 단풍놀이도 없다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며 휴강을 때린 학과장님 대신 휴강을 고지한 타라는 재킷을 한 손에 들고 교정을 걸으며 예쁘게 물든 단풍을 올려다봤다.
담배, 혹은 커피가 고파지는 완벽한 날씨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긴 교수도 학생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교수실엔 중간고사 시험지가 쌓여있고, 당장 모레까지 줘야하는 원고도 타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라는 지름길로 곧장 가는 대신 교정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길로 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단풍보다 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하얀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뭐하는 거지?”
“아, 그게 교수님 머리에 단풍잎이 붙어서…. 떼어드리려고….”
“그럼 부탁할까.”
타라는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 영리한데다 성실하고, 예뻐서 꽤나 인기가 있는 1학년 대표. 첫학기 문학의 이해에서 냈던 레포트도 꽤 괜찮았고, 그냥 그저 그런 학부생과는 다른 원석이라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이기도 했다. 물론 나름의 호감을 품고 있는 것과 학부생활은 별개긴 하지만.
조심스레 머리로 손을 뻗는 그녀의 희고 가는 손목을 본 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핏줄이 보이는 손목 안쪽. 이건 꽤 위험할지도. 그래서 시선을 내리면 전공책을 든 손 아래로 좀처럼 드러내는 일이 없던 흰 다리가 보였다. 팔랑거리는 연분홍 스커트에 차분한 블라우스. 내내 스니커와 운동화를 벗어나는 일이 없던 신발도, 꽤 굽이 높은 메리 제인. 머리를 스치고 떨어지는 손길에 타라는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치마 입었네.”
“아, 네.”
“어디 가?”
“앤지가 소개팅시켜준대서요.”
소개팅. 타라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려다 손을 재킷에 넣었다. 걸음을 늦추자 반 걸음 앞서 걷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흰 목이 한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루이스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타라는 루이스가 과제로 낸 시를 떠올렸다. 그녀의 글도 그랬다. 한없이 차가운 이성에 꽃잎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감성이라니, 누구나 탐을 낼 법한 녀석이었다. 물론 아직은 갈고닦아야 하는 원석에 불과하지만.
“으앗.”
“조심.”
반 걸음 앞서 걷던 루이스의 발목이 옆으로 꺾이며 몸이 휘청였다. 그대로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팔을 잡아챈 타라는 루이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라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죄, 죄송해요.”
“힐을 신을 땐 조심해야지. 발목은.”
“괜찮아요!”
타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치마 안쪽이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크게 꺾였던 발목을 쥐자 한 손에 잡혔다.
“아야야.”
“이래도 괜찮다고?”
살짝 힘을 주어 잡자 바로 새어나오는 약한 신음에 올려다보며 씩 웃자 루이스가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교수실 바로 앞이니까 쉬고 가지.”
“됐어요!”
“그래? 스타킹 올 나갔는데?”
루이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기껏 차려입고 나온 애를 놀려먹는 자신도 참 짓궂고 유치했지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루이스를 보는 거에 비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갈래, 말래?”
“…또 부려먹으실 거잖아요.”
“안 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약속.”
타라는 뺨을 불리고 입술을 내밀며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쩜 얘는 토라진 것도 귀엽다니, 더 놀리고 싶어지게. 타라는 머릿속에 시 한편을 써내리며 한산한 교정을 걸었다. 따라오는 구두소리가 즐거웠다.
“앉아.”
교수실에 도착한 타라는 루이스를 소파에 앉히고 보건실에서 받은 구급상자에서 스프레이 파스와 붕대를 꺼냈다.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루이스는 처음처럼 불편해했다.
“왜 이래, 처음도 아닌데.”
“그게…., 아!”
“뿌린다.”
타라는 루이스의 구두를 잡아 발목에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부어오르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단단하게 붕대를 감는데 까만 구두의 빨간 밑창이 눈에 들어왔다. 타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게 뭐?”
“그게, 교수님이 이렇게 친절한 게… 처음이라….”
“내가?”
고개를 올려 묻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 받을 짓을 했던가, 타라는 붕대를 고정하며 지난 학기를 떠올렸다. 술자리에서 꽐라가 안 되게 도와주고, 들러붙는 녀석들 걷어주고, 힘내라고 에너지 음료도 쥐어줬는데. 물론 그와 별개로 다시 써오라며 다섯 번 쯤 작품을 돌려보내고 기말 레포트도 안 받아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수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로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교수님 항상 저만 갈구시잖,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다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난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는데? 너 한정 아니야. 그거.”
“…….”
루이스가 억울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타라는 책상 앞에 앉아 등을 기댔다.
“근데 어쩌냐, 난 너한테 밉보이는 거 싫은데.”
이번엔 당황. 늘 생각하는 거지만 놀란 눈이 토끼같아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하지마라.”
“…뭘요?”
“소개팅.”
“왜요?”
“내가 싫으니까.”
이번에도 놀랄 줄 알았는데, 놀라는 대신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타라는 책상 위에 올려둔 루빅스 큐브를 잡아 돌렸다. 낮술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생각을 다 거치지 않고 나오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입가에 여유롭게 미소를 띠우는 건 잊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반. 타라는 울리는 루이스의 핸드폰 진동에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교수님.”
“받지마. 가지도 말고.”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글쎄. 왜 이럴까.”
“교수님 평판 좋은 것도 알고, 교수님 강의도 좋은데요…. 자꾸 이러시는 건….”
“귀여워라. 지금 그걸 다 믿었어?”
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맹해지는 루이스의 표정이 볼만했다. 입가를 가리고 웃던 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뭐해, 전화 안 받고.”
루이스는 화도 못 내고 가방 속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타라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루이스가 황급히 볼륨을 줄였다.
“응, 응. 미안. 곧 갈게. 응. 이따 얘기해.”
타라는 제게서 고개를 돌리고 전화하는 루이스를 보며 웃음을 거뒀다. 싸하게 식은 머리로 한 손으로 큐브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루이스가 전화를 끊으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억울하단 표정으로 입을 비죽 내밀었다.
“또 이런 장난하시면 그땐 진짜 신고할 거예요!”
“얼른 가봐. 발목 조심하고.”
루이스가 대답도 없이 교수실을 나갔다. 홱 고개를 돌리며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치마자락이 눈에 선했다. 타라는 펜을 들었다. 글을 쓰려다, 흰 종이 위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20도 쯤 되는 술을 맨 속에 들이켠 기분이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큐브를 내려놓았다. 등 뒤로 의자를 밀어 쳐 놓은 블라인드를 올렸다. 교수회관을 종종 뛰어가는 루이스를 지켜보다, 창문을 닫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