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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2015/03/12
“그만 하고 와서 앉아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티엔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엔은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선 이 사람이 필요하다. 바위 위에 앉은 루이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장작더미를 뒤적였다. 또르르 굴러 나온 새까맣고 투박한 감자 네 개. 껍질은 새까맣게 탔지만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굴리니 껍질이 타서 떨어진 곳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걸 보니 또 식욕이 돌아 티엔은 루이스가 앉은 것처럼 적당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아요.”
한번 허기가 지니 나무가 타는 냄새마저 식욕을 돋웠다. 지금 만졌다간 입에 넣기도 전에 손을 델 것을 알지만 눈앞에 먹을 걸 두고도 먹지 못하는 건 꽤나 인내가 필요했다. 티엔이 감자를 빤히 보며 침을 꼴깍 넘기는 사이 일어난 루이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밟았다. 놀란 티엔이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불을 끄는데, 티엔은 기껏 피운 불을 꺼트리는 까닭을 몰라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텐데?”
“해가 지면 불빛도 더 잘 보이죠.”
티엔은 모든 주도권을 뺏긴 채 휘둘리는 게 묘하게 불쾌해 시선을 돌렸다. 듣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스는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옮기다 까맣게 탄 껍질을 반 벗겨내 티엔에게 건넸다. 기분이 상했던 티엔은 잠시 감자와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곤 감자를 받아들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당장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주린 배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티엔은 제 몫의 감자 두 개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감자는 소금도 치지 않고 구웠을 뿐인데도 맛있었다. 그리고 먹을 게 들어갔는데도 허기가 달래지기는커녕 더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어릴 적 정관정요를 다 외우지 못해 스승님이 벌로 다 외울 때까지 식사를 금지했을 때도 이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티엔이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루이스가 제 몫을 하나 양보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티엔은 염치가 없어 선뜻 받지 못했다. 아직 하나도 채 먹지 않은 루이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를 집어 내밀었고, 티엔은 못 이긴 척 받았다. 티엔은 마지막 감자를 루이스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다. 물론 그 하나를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허기가 달래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감자를 먹는 사이 하늘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고, 루이스는 챙겨온 모포 한 장을 티엔에게 건넸다. 황궁을 떠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침상도 없이 냉기가 올라오는 땅에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티엔이 모포를 들고 가만히 있자 루이스가 다가와 모포를 삼단으로 접어 불을 피웠던 자리 옆에 펼치곤 두꺼운 쪽은 깔고 나머지 한쪽과 외투를 덮고 자야한다고 일러주었다. 티엔은 방금 먹었으니 바로 누울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내일도 길을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했고, 어차피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티엔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양손으로 팔을 쓸며 온기를 더하는 사이, 루이스가 물통을 담았던 주머니에서 통을 꺼냈다. 빈 주머니에 불을 지필 때 감자와 함께 넣었던 둥근 돌은 아직도 뜨거워 장갑을 낀 손으로도 못 집고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담아야 했다. 주머니 안에 뜨거운 돌을 넣은 루이스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티엔에게 건넸다.
“안고 자는 게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예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무엇이냐 묻는 대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티엔에게 루이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고집 센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했는데, 힘든 길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따라오는 게 장하기도 하고 평생 배고프고 추운 걸 몰랐을 사람이 불평 한 번 않는 게 놀랍다 못해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말단 관직에 서출이라 해도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 귀한 집 자제분은 명령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다 뿐이지 정갈한 말투와 행동거지가 옛 성현들이 그리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루이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굳센 입술이며 침착하지만 강한 눈매, 짙은 눈썹.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루이스는 이 년 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험한 산을 타며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떠돌았다. 자신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익힌 것들은 루이스가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산을 헤매던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때도 둘이 감자를 캐 나눠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금도 물도 없이 참 잘도 먹었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더러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그냥 그녀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늙은 주인어른을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남기로 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 그 아가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다. 귀한 가문의 따님이니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루이스는 추억이 된 기억을 회상하며 외투의 끈을 풀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았다. 지금은 적이 나타나도 어느 정도까진 대처할 수 있고, 식량도 있는 데다 야영 경험도 있고 추적이 붙은 것도 아니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루이스가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누우려는데, 티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안개가 걷힌 밤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뜨거운 돌이 든 주머니의 온기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에 넋을 잃고, 경치에 취한다. 티엔은 먼 산골로 유배 간 이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을 벗 삼아 술 한 잔에 시를 읊는 것이야말로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닌가.
티엔은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적어도 티엔에겐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다. 훌훌 털고 떠나버리기엔 제 어깨에 짊어져야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두를 떨쳐버리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티엔은 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가며 얻은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쾌해진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깔아둔 모포에 누웠다.
딱딱하고 냉기가 올라오는 잠자리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티엔은 몸을 모로 뉘었다가 다시 바로 누웠다. 주머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아주진 못했고, 군데군데 돌이 박힌 돌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등이며 다리가 욱신거렸다. 티엔이 자리를 못 잡고 몇 번 쯤 자세를 바꾸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티엔이 고개를 들자 루이스는 덮고 있던 외투를 티엔에게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민 두꺼운 외투를 받자 루이스는 다시 모포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티엔이 외투를 돌려주려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에게 등을 돌리며 난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하곤 길게 하품했다.
“흐아암. 그냥 아래 한 겹이라도 더 깔아요. 돌이 식으면 더 추울 거예요. 해가 뜨면 또 쉴 새 없이 걸어야 하니까 뒤척이지 말고 자둬요.”
티엔은 한사코 돌려주려고 외투를 넓게 펼쳐 루이스의 모포 위에 덮으려 했다. 루이스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호함에 손을 거뒀다. 티엔은 루이스에게 외투를 돌려주는 대신 덮고 있던 제 외투를 아래 깔고 발끝부터 배를 덮는 게 고작인 루이스의 외투를 몸 위에 덮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루이스의 외투와 달리 티엔의 외투는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값은 물론 보온성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열을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과 하나를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루이스의 친절을 바닥에 깔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루이스의 외투 위에 모포를 한 겹 덮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며 가슴이 휑해 외투를 끌어올리자 이번엔 발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키차이가 있다 보니 몸을 다 덮기엔 외투가 짧았다. 발과 가슴 사이에서 고민하던 티엔은 그대로 외투의 모자 부분으로 목을 감쌌다. 외투를 덮지 않아도 모포로 덮으면 바람은 피할 테고, 두꺼운 가죽신발에 안에는 부드러운 털을 덧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작은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나무의 잔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은 숨소리. 티엔은 그 소리를 듣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지치기도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이 저마다 반짝이는 그 절경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황궁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찬란하고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별빛. 궁에선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었는데. 티엔은 그 별빛에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지 않은 흙의 축축한 냄새, 나무와 풀이 내는 성긴 겨울의 냄새. 숨을 뱉을 때마다 뿌옇게 흐려지는 하얀 입김. 티엔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티엔의 호흡이 겹쳐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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